프랑스 살롱, 햄프턴의 서머 하우스, 모던 호텔을 모두 품은 집

디자이너 권순복이 고친 87평 빌라

글 정경화 기자 | 사진 박찬우

마젠타 권순복 대표가 프렌치 클래식 스타일로 고친 거실 겸 다이닝 공간. 코린트 양식의 기둥과 파넬의 커브드 소파가 두 공간을 느슨하게 구분한다.

프랑스 대저택의 살롱, 남프랑스와 뉴욕 햄프턴의 여름 별장, 모던한 호텔 라운지까지. 디자이너 권순복이 고친 87평 빌라는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이 펼쳐진다. 그의 손길은 단순히 다채로운 스타일의 공존을 구현하는 것을 넘어 집주인의 라이프스타일까지 아름답게 조율해내고 있었다.

고친 사람 이야기

“프랑스는 2백 년 전에 살던 사람이 다시 파리에 가도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다고 해요. 그만큼 쉽게 변하지 않고, 그 안에서 아주 조금씩 모습이 바뀝니다. 과거가 현대와 공존하며 지금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 변화하면서도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킬 줄 아는 것이 프렌치의 매력이에요. 그 매력에 빠져 이 아름다움을 우리 공간에 어떻게 녹여낼지 고민하며 일을 시작했는데,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헤어나오지 못했네요.(웃음)”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마젠타를 이끌며 프렌치 스타일을 자신만의 언어로 확장해온 디자이너 권순복. 이제 클래식한 디자인은 그의 독보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그가 지난겨울 작업한 집 소식을 전해왔다. 정통 프렌치부터 클래식, 모던까지 문을 열 때마다 다른 스타일이 나타나는 집을 완성했다는 이야기였다. 취재를 위해 방문한 집의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그 말을 120% 이해할 수 있었다.

서재에서 바라본 복도. 벽 대신 유리문과 창을 설치해 복도까지 탁 트인 느낌을 냈다. 오후에는 은은한 서향 빛이 복도까지 드리운다.
서재에서 바라본 복도. 벽 대신 유리문과 창을 설치해 복도까지 탁 트인 느낌을 냈다. 오후에는 은은한 서향 빛이 복도까지 드리운다.

팔색조 같은 매력을 품은 이 87평 빌라의 주인공은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사는 30대 1인 가구다.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그에게 이곳은 무엇보다 중요한 장소였다. 내가 아닌 누가 살아도 관계없을 무색무취 아파트가 아니라, 자신의 색깔이 담긴 집을 원하던 클라이언트는 모던한 화이트 인테리어 대신 유일무이한 공간을 구현해줄 디자이너를 찾아 나섰다. 기나긴 탐색 끝에 발견한 인물이 바로 권순복 대표였다.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의 취향이 완벽히 맞아떨어질 때, 그리고 서로의 일을 온전히 신뢰하고 존중할 때만큼 좋은 출발점이 또 있을까. 두 사람이 서로의 겹치는 취향을 확인한 후, 레노베이션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개월의 디자인, 4개월의 시공을 거쳐 빛바랜 대리석과 체리목 마감, 중후하고 다소 어둡던 예전의 집은 따뜻하고 밝은, 무엇보다 집주인만의 ‘스타일’이 살아있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남프랑스와 햄프턴의 휴양지 느낌을 물씬 풍기는 주방. 조명이나 후드는 물론 냄비와 식기까지 모두 권순복 대표가 집의 분위기에 맞춰 직접 골랐다.
남프랑스와 햄프턴의 휴양지 느낌을 물씬 풍기는 주방. 조명이나 후드는 물론 냄비와 식기까지 모두 권순복 대표가 집의 분위기에 맞춰 직접 골랐다.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은 현관에서 거실과 주방이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라는 점이었어요. 복도가 길게 이어지고, 그 양쪽으로 실이 모여 있는 독특한 평면이었죠. 또 한쪽은 서향, 거실과 주방이 있는 반대쪽은 동향이라 아침에는 거실로 햇살이 들고, 오후에는 반대편 공간에서 은은한 서향 빛이 들어와요. 각각의 장점을 살려 클래식하면서도 따뜻한 집을 완성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재는 주로 목재를 사용해 편안하고 모던한 분위기를 냈다. 고양이를 보며 작업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집주인의 최애 공간 중 하나다.
서재는 주로 목재를 사용해 편안하고 모던한 분위기를 냈다. 고양이를 보며 작업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집주인의 최애 공간 중 하나다.

스타일 외에 집주인이 요청한 또 한 가지는 드레스룸과 고양이 방, 그리고 차분히 집중할 수 있는 서재가 있는 집. 권순복 대표는 서향 존의 서브 거실이던 곳에 문을 달아 서재로 바꾸고, 방 하나는 고양이 방과 드레스룸으로 나누었다. 서재는 벽으로 완전히 막는 대신 유리로만 마감했다. 덕분에 서재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복도까지 막힘없이 드리우고, 공간 전체가 밝고 탁 트인 느낌이 든다. 일을 하다가도 복도를 지나는 고양이와 집 안 풍경을 언제든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은 소소한 기쁨을 주기도 한다. 각각의 실에는 클라이언트와 깊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파악한 취향과 무드, 라이프스타일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집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거실 겸 다이닝 공간은 프랑스 어딘가의 샤토에 온 듯한 분위기. 벽면은 물론 천장까지 고전적 장식으로 가득 채우고, 아칸서스잎을 새긴 코린트 양식의 기둥, 아치와 벽등, 문손잡이까지 실제 프랑스 고성이나 건축 아카이브에서 비롯한 디테일을 곳곳에 더했다. 거실이 살롱의 한 장면이라면 주방은 미국 햄프턴의 휴양지를 연상시킨다. 자연석으로 벽과 바닥을 마감하고, 곳곳에 고재를 사용해 코티지처럼 내추럴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냈다. 계획할 때만 해도 거실과 비슷한 무드이던 메인 침실과 욕실은 작업이 진행될수록 조금씩 풍성해져 웨인스 코팅을 입은 서랍장, 앤티크한 벽등, 골드 장식이 더해졌고, 결국 정통 프렌치 클래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마무리됐다.
세 공간에 화려한 디테일을 아낌없이 채워 넣은 대신 서재와 게스트룸을 비롯한 건너편 공간은 도드라지는 자재나 장식을 최대한 덜어냈다. 눈에 피로감을 주지 않는 간접조명을 택하고, 목재를 중심으로 석재와 브론즈, 어두운 톤의 마감재를 더해 모던하면서도 깊이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호텔 라운지 무드로 연출한 게스트룸. 무니끄 패널과 브론즈 금속 장식, 바이스프링 침대가 어우러졌다.
호텔 라운지 무드로 연출한 게스트룸. 무니끄 패널과 브론즈 금속 장식, 바이스프링 침대가 어우러졌다.
고양이 방은 템퍼 보드를 둥글게 말아 벽을 만들었다. 체어와 베드, 캣트리 등 가구는 피케아.
고양이 방은 템퍼 보드를 둥글게 말아 벽을 만들었다. 체어와 베드, 캣트리 등 가구는 피케아.

“단순히 스타일을 흉내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더 중요한 건 그 양식이 왜 이런 모습으로 탄생했는지 기원과 의도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진짜를 구현하고, 나의 언어로 다시 해석할 수 있어요. 많은 사람이 몰딩이라 부르는 벽면 장식의 정확한 이름은 부아즈리boiserie예요. 이런 용어를 제대로 아는 것에서 올바른 이해가 시작됩니다.”
이를테면 이 집에 유독 문이 많은 이유는 프렌치 스타일에서 대칭이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실과 다이닝 곳곳에서 보이는 문의 절반은 기능이 아니라 장식을 위한 것이다. 복도의 서까래는 한옥이 아니라, 15~16세기 프랑스 샤토의 천장에서 얻은 아이디어다. 이처럼 권순복 대표는 자신이 표현하려 했던 스타일의 숨은 질서와 원칙을 파악하고, 타고난 공간 감각을 발휘해 기둥과 천장, 벽면 곳곳에 절묘한 비례와 구성으로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정통 프렌치 클래식의 우아함을 고스란히 담은 메인 침실. 침대는 사보이어.
정통 프렌치 클래식의 우아함을 고스란히 담은 메인 침실. 침대는 사보이어.

모든 실이 저마다 다른 스타일을 품고 있지만, 결코 따로 떨어진 장면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 또한 그의 디테일이 만들어낸 인상이다. 서재와 게스트룸에는 드레스룸 가구에 사용한 금속 디테일이 포인트로 등장하고, 게스트 욕실에서는 주방 벽면을 채운 돌을, 복도에서는 주방 천장에 사용한 고재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은근한 연결성을 부여해 각기 다른 스타일이지만 하나의 집이라는 감각을 지니도록 한 것. 인테리어 디테일은 물론 수저 한 벌, 그릇 한 점까지 클라이언트와 집의 분위기를 닮은 아이템으로 직접 고른 모습을 보며 이 집의 완성도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름답게 고친 집에서 아름답게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 권순복 대표가 프렌치 스타일의 뿌리까지 이해하고 구현한 집은 그 안의 라이프스타일까지 같은 방향으로 이끌어내고 있었다.

전문가

권순복 대표 |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마젠타

권순복 대표는 정통 프렌치 스타일을 기반으로 31년간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마젠타를 이끌어왔다. 주거 공간, 상업 공간, 전시, 공간 스타일링, 기업 컨설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발휘하며, 공간과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는 창의적 디자인 솔루션을 제안한다. 감성과 기능을 조화롭게 담아내는 공간 연출을 통해 차별화된 디자인을 선보이며,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soonbok_kwon